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광주시 당일 여행 - 율봄식물원, 경기도자박물관 등

by 감사하쟈 2025. 4. 15.

광주시 율봄식물원
광주시 율봄식물원

광주시 당일 여행, 율봄식물원

가을은 늘 감성의 계절이라지만, 혼자 걷는 가을 길은 그 감정을 더 진하게 만든다. 서울을 벗어나 가볍게 떠난 나의 광주 여행, 첫 목적지는 율봄식물원이었다. '율봄'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어딘가 정갈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정돈된 정원과 자연스럽게 흩어진 들꽃, 그리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는 산책로가 나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가을의 식물원은 여름의 활기를 뒤로하고, 조금은 성숙하고 차분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국화, 백일홍, 그리고 곳곳에 아직 남아 있는 코스모스들이 햇살 아래 흔들리고 있었고, 붉게 물든 단풍이 산책길 위로 부드러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걷는 내내 발밑에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이 깔려 있었고,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귀를 간지럽혔다. 전시된 조형물 사이로 지나며, 나는 예술과 자연이 공존하는 공간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식물원의 가장 특별한 점은 혼자 있어도 전혀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북적이지 않고, 공간 곳곳이 여유롭게 비워져 있어서 오히려 나 자신과 조용히 마주하기에 좋다. 커다란 나무 아래 놓인 벤치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풍경을 바라보는 그 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화였다. 자연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위로는 소란스럽지 않다. 율봄식물원은 바로 그런 위로의 공간이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곳은 '미로 정원'이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이 정원은 어릴 적 놀던 뒷산처럼 친숙하면서도, 낯선 감성을 자극했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너무 따뜻해서 그 자리에서 몇 분이고 서성거렸다. 가을이 되면 모든 게 한 톤 낮아지는데, 이곳은 그 차분함을 가장 아름답게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꽃을 보고, 나무를 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단순히 걷고 보고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그곳은 가을의 초입에서 나를 맞이한 풍경이었다.

경기도자박물관, 그리고 만해기념관

율봄식물원에서 자연에 흠뻑 젖은 뒤, 나는 다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광주의 곤지암에는 예술과 역사가 함께 깃든 두 곳이 있다. 바로 경기도자박물관만해기념관이다. 두 장소는 각각 전통과 정신, 예술과 신념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가을의 정서와도 묘하게 잘 어울렸다. 경기도자박물관에 들어선 순간, 나는 시간의 결 속으로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조선시대 백자의 본고장이라는 이 지역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긴 전시 공간에는, 세월을 담은 도자기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하나하나 유리 진열장 안에 정갈하게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 도자기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시대의 생활, 도공의 철학, 그릇에 담긴 음식까지도 상상하게 하는 깊이가 있었다. 특히 도자기 파편을 전시한 공간은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온전하지 않은 백자 조각들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세월의 흔적은 더욱 뚜렷했다. 균열이 난 표면과 부드럽게 닳은 테두리는 시간이 만든 무늬 같았고, 마치 사람의 인생을 보는 듯했다. 도자기 한 점 한 점에 담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나의 삶도 어디선가 이런 결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렸다. 그 여운을 안고 향한 곳은 만해기념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간 작은 기념관은 조용하고 고요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누구보다 강렬했다. 만해 한용운, 그는 단지 시인이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시대를 이끈 정신이자 울림이었다. 기념관에 전시된 유묵과 원고, 당시 활동 사진들을 보며 나는 오랜만에 '존경'이라는 단어를 마음 깊이 꺼내게 되었다. 무엇보다 만해의 대표작 '님의 침묵' 초판본을 실제로 마주했을 때, 눈이 잠시 머물렀다. 얇고 낡은 책 한 권 안에 깃든 그 단단한 정신. 절절한 그리움과 불굴의 저항이 섞여 있는 언어들. 한 줄 한 줄 천천히 읽어나가며 나는 내 안의 의지를 되새겼다. 만해는 담백하고 단단하게, 그러나 결코 흔들리지 않는 방식으로 시대와 맞섰다. 기념관을 나서며 언덕길 아래로 천천히 걸었다. 바람은 제법 선선했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결에 떨어졌다. 만해가 지녔던 신념의 무게와, 도자기 속에 남겨진 수백 년의 시간들이 뒤섞여 내 마음 깊이 남았다.

경안천 습지생태공원

여행의 마지막은 언제나 가장 깊이 남는 법이다. 나는 하루의 끝을 가장 조용하게, 가장 자연스럽게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경안천 습지생태공원이었다. 이 공원은 인공적인 정원과는 다른, 날것 그대로의 자연을 보존한 공간이다. 도심과는 다소 떨어져 있어 더 조용하고, 그만큼 자연의 소리가 훨씬 가까이 들렸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공기의 온도가 달랐다. 습지 특유의 촉촉하고 청량한 느낌이 코끝을 간질였고, 잔잔한 물소리와 함께 자연의 기척이 살아 숨 쉬는 듯했다. 산책로는 길게 뻗어 있었고, 그 위를 걷는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졌다. 억새가 바람결에 출렁이는 모습은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렸고, 가끔씩 나타나는 청둥오리나 백로의 모습은 도심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전망대가 나타난다. 나는 그곳에 올라앉아 물가를 바라보았다. 햇살이 수면 위에 부서지듯 퍼지며 반짝이는 모습은, 오래된 기억 하나를 꺼내놓는 듯한 아련함을 안겨줬다. 습지의 풍경은 말이 없지만, 그 고요함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듣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오로지 물의 흐름과 바람 소리, 새들의 지저귐만이 공간을 채웠다. 나는 이 시간이 너무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하러 온 여행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러 온 여행이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해가 기울고, 하늘이 점점 주황빛으로 물들어갈 때쯤, 나는 천천히 돌아 나왔다. 오늘 하루가 특별했던 이유는 바로 이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경안천에서의 시간은 내게 일상으로 돌아갈 용기와 에너지를 선물했다. 고요한 물가에 기대어 하루를 마무리를 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