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당일 여행, 수원화성박물관과 팔달산성
지난달 어느 평화로운 주말, 나는 혼자 조용히 역사와 마주하고 싶다는 마음에 수원을 찾았다. 첫 목적지는 수원화성박물관. 장안문 근처에 위치한 이곳은 수원 화성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핵심 공간이다. 박물관 건물부터가 현대적인 느낌과 전통적인 건축미가 어우러져 있었고, 내부에 들어서자 정조대왕의 개혁 정신과 화성축성에 얽힌 과학기술, 군사 전략, 백성을 위한 마음이 전시물 하나하나에 녹아 있었다. 정조가 왜 이토록 화성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그리고 이 도시가 단순한 성곽을 넘어 이상적인 도시로 설계되었는지를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특히 감탄했던 부분은 '화성성역의궤'를 디지털로 복원한 전시였다. 도면과 복원 영상이 정말 섬세해서, 200년 전 화성을 축성하던 장인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군사적 기능뿐 아니라 상업과 문화, 정치까지 고려한 도시 계획이란 점에서 수원화성은 조선 후기의 천재적 작품이라고 느껴졌다. 조용한 전시실을 거닐며 나도 모르게 정조대왕의 삶과 그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에 깊이 빠져들었다. 박물관을 나온 뒤 나는 팔달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팔달산성은 팔달산 일대에 남아 있는 성곽 유적지인데, 오히려 화성의 일부보다 더 오래된 삼국시대 산성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특별했다.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정상까지 오르며 잠시 현대의 일상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능선 위를 걷다 보면 곳곳에 봉수대 흔적이나 성벽 터가 보이고, 정상에서는 수원 시내와 성곽이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조망이 펼쳐진다. 약간 흐렸던 하늘이 갑자기 개면서 화성의 지붕들 위로 햇살이 내려앉는 순간, 혼자 떠난 이 여행이 너무나 잘한 선택이었음을 느꼈다. 조선의 기운을 머금은 공간에서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이, 내 마음도 덩달아 정화시키는 듯했다.
팔달문 시장
산에서 내려와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팔달문 시장 입구에 다다랐다. 수원 화성의 남문인 팔달문은 지금도 성문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은 채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수원의 중심이자, 지금도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재래시장이 자리한 곳이다. 나는 시장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삶의 온기가 확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익숙한 좌판들, 전통 간판들, 여기저기서 들리는 상인들의 외침, 그리고 고소한 기름냄새가 후각을 먼저 자극했다. 첫 번째로 들른 곳은 오래된 전통 떡집. 가래떡을 썰어주는 주인아주머니께 말을 걸자 3대째 가게를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수수한 팥시루떡 한 조각을 건네받아 입에 넣자 쫀득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퍼졌다. 다음으로는 수원 명물 중 하나인 통닭 골목. 예전엔 그냥 시장닭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은 SNS에서도 유명하다고 한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닭 한 마리를 혼자서 거의 다 먹어버렸다. 이건 혼자 여행의 특권 아닌가 싶었다. 시장 구석구석을 돌다 보니, 오래된 전파사, 잡화점, 양복점까지 여전히 영업 중인 모습이 인상 깊었다. 현대적인 대형마트와는 다른 종류의 시간 여행이 가능했다. 특히 어떤 골목에서는 오래된 기와집 형태의 한옥이 카페나 소품 가게로 탈바꿈되어 있었고, 전통과 현대가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나는 한참을 걷고 또 걸으면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반갑게 인사하고, 어떤 아주머니는 내가 혼자 왔다고 하자 고구마 한 조각을 쥐어주시기도 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과 마주하는 순간 또한 여행의 매력이다.
장안문과 장안공원
팔달문에서 장안문까지는 성곽을 따라 걸어갈 수 있는 코스가 있다. 나는 점심을 든든히 먹고 난 후 이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성곽 위로 이어지는 길은 비교적 평탄했고, 길 양 옆으로는 봄 햇살 아래 연둣빛 나무들이 흔들리며 걷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수원의 북문인 장안문에 도착했다. 장안문은 수원화성 4대 문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었다. 아치형 돌문과 2층 문루가 조화를 이루며 조선 후기 건축미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했다. 장안문 주변은 화성축성 당시 상업과 교통의 요지였다고 한다. 지금도 주변에는 카페, 갤러리, 도서관 등이 있어 지역 주민들의 삶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나는 장안문 앞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잠시 쉬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혹은 나처럼 혼자 걸어오는 사람들까지. 각자의 속도로 걷고 있는 모습들이 도시의 하루를 고요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윽고 나는 장안문 근처의 장안공원으로 들어섰다. 이 공원은 수원의 도심 속 쉼터 같은 공간이다. 조용한 연못과 다리, 그리고 나무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는 사람들. 나도 벤치에 앉아 그날 박물관에서 봤던 전시를 떠올리며 메모를 꺼내 간단히 여행기를 적어보았다. 마침 봄꽃이 피기 시작한 시점이어서 공원 한쪽에는 분홍빛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소리마저 따뜻하게 느껴졌다. 수원은 정말이지 혼자 와도 전혀 외롭지 않은 도시다. 역사적 깊이와 활기찬 삶, 그리고 조용한 여유가 어우러져 있어 마음속 빈 공간들을 하나씩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장안공원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나니,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힘도 생긴 듯했다. 언젠가 또 이 도시를 걷게 될 날을 기약하며, 나는 조용히 수원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