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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당일 여행기 -호로고루, 당포성, 숭의정, 고랑포구

by 감사하쟈 2025. 4. 17.

연천군 호로고루
연천군 호로고루

연천 당일 여행, 호로고루

작년 가을, 일상의 반복과 생각의 무게에 눌려 조금은 지쳐 있던 나는, 사람 많은 곳보다는 조용하고도 깊은 울림이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지도 위를 따라 손가락으로 찾은 곳이 바로 연천군, 그중에서도 '호로고루'였다. 서울에서 자차로 두 시간 반 정도 달리니, 어느새 복잡한 도시의 풍경은 사라지고, 황금빛 들판과 낮게 깔린 구름, 그리고 잔잔한 강물의 윤곽이 나를 맞이했다. 호로고루는 한때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의 남진을 막기 위해 구축한 최전방 보루 중 하나다. 지금은 성벽 일부만 남아 있지만, 강을 끼고 위치한 이곳의 지형을 보면 왜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였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입구에는 그리 크지 않은 주차장이 있고, 그 옆으로 잘 정비된 산책로가 호로고루 언덕까지 이어져 있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갈대밭과 억새가 끝없이 펼쳐지고, 가을의 바람은 마치 천천히 숨 쉬는 생명체처럼 나를 부드럽게 감싼다. 언덕 위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바로 눈앞에는 임진강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고, 그 건너편으론 북한의 산자락이 아련하게 이어졌다. 아무 말 없이 서서 그 풍경을 바라보는 시간은 뺨을 스치는 바람, 풀벌레 소리, 강물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는 햇빛들로 가득했다. 이곳은 단지 역사 유적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기억의 장소 같았다. 호로고루는 '고루'라는 말이 상징하듯, 성과 보루의 중간 개념으로, 방어용 시설이었다. 지금은 성벽 흔적만 남아 있어 허허로운 평지처럼 보이지만, 이곳에 서 있으면 마치 고구려 병사들이 강 건너를 바라보며 긴장 속에 지내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르는 듯하다. 고구려의 마지막 기운이 남아 있는 땅, 그리고 그 위에 평화롭게 흘러가는 지금의 시간. 이 둘이 겹쳐지는 그 순간, 나는 어떤 위로를 받았다. 그날, 호로고루에는 나 말고도 몇몇 사람이 더 있었다. 대부분은 사진을 찍으러 온 사람들이었고, 어떤 이는 돗자리를 펴고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한쪽 그늘에 앉아 노트를 꺼냈다. 요즘 잘 쓰지 않던 손글씨로 몇 줄 적어 내려가다 문득, 나 자신이 이곳에서 아주 오래전 시간과 조용히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쁘게 살아가며 지나쳤던 생각들, 그리고 내가 어디쯤 서 있는지를 돌아보게 해 준 이 고요한 언덕 위에서의 시간은, 어느 유명한 절경이나 놀이공원보다도 훨씬 값졌다. 호로고루를 떠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강 쪽 끝에 서서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런 장소가 서울 근교에 있다니. 누군가에게는 그냥 작은 유적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이 짧은 여행의 출발점이자, 감정의 정리가 시작된 곳이었다. 일상의 소음과 디지털의 번쩍임 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역사, 바람과 나 자신만이 존재하던 그 공간의 호로고루는 나에게 평화를 주었고, 그 여운은 여행이 끝난 지금도 내 안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다.

당포성과 숭의전

호로고루에서의 감흥이 채 식기 전, 나는 임진강을 따라 남쪽으로 차를 몰아 '당포성'으로 향했다. 도착한 그곳은 생각보다 외진 듯한 분위기였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이 당포성이 품고 있는 고대의 향기를 더욱 짙게 느끼게 해 주었다. 이 성은 고구려 혹은 신라 유적으로, 정확한 기록은 적지만, 삼국 간의 치열한 다툼의 흔적이 담겨 있는 성곽이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임진강과 당개샛강 사이 절벽 위에 터를 잡은 성터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였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아래로 흐르는 강과 맞닿은 바위 절벽의 모습이 압도적이다. 그날은 하늘이 유난히 맑아, 멀리까지 펼쳐진 풍경이 더욱 인상 깊었다. 절벽 끝자락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마치 내가 시간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공간이지만, 수백 년 전엔 이곳에서도 분명 누군가는 활을 쏘고, 누군가는 방어를 외쳤을 것이다. 당포성을 뒤로하고 나는 다음 목적지인 '숭의전'으로 향했다. 숭의전은 고려 태조 왕건을 비롯해 7명의 고려 왕들을 제향 하는 사당이다. 조선시대에 건립된 이 사당은 우리나라에서 드물게 고려왕을 기리는 공간으로, 연천의 역사적 무게감을 더해준다. 입구에 들어서자 기와지붕과 나무기둥의 고풍스러운 모습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숲과 연결된 아늑한 공간 속에서 고즈넉하게 세워진 사당은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사당 내부에는 왕들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 있었고, 해설 안내판을 읽으며 당시의 정치적 맥락과 조선 초기의 고려 왕실에 대한 존중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는 단순한 유적 탐방이 아니라, 역사와의 조우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정통성을 일부 인정하고 있었다는 이 숭의전의 존재는, 한국사의 복잡함과 유연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했다.

고랑포구 역사공원

여행의 마지막은 '고랑포구 역사공원'이었다. 앞선 세 곳이 군사적이고 의례적인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훨씬 더 일상적이고 서민적인 역사의 현장이었다. 고랑포구는 과거 임진강을 통한 상업과 교통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배들이 오가고,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며, 삶이 오롯이 녹아 있던 공간이었기에 이곳의 분위기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역사공원은 꽤 넓게 조성되어 있었고, 실제 포구를 재현한 나루터, 상점 모형, 옛 창고, VR 체험관 등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날은 평일이라 한산했지만, 덕분에 나는 조용히 전시를 둘러보며 이 공간의 숨결을 천천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재현된 옛 장터거리에서는 직접 짚신을 신어보거나, 나룻배를 조종해 보는 체험이 가능했는데, 나도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공원 안에는 전시관도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고랑포구가 조선 후기에 어떻게 물류 거점으로 성장했는지, 해방 전후 어떤 정치적 사건이 이곳을 거쳐갔는지를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단순한 포구가 아니라, 전쟁과 평화, 삶과 생존이 오갔던 역사적 장소임을 실감하게 만든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임진강을 바라보며 잠시 벤치에 앉아 있자니, 이곳을 오갔을 수많은 이들의 숨결이 시간 너머에서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고랑포구 역사공원은 연천의 역사가 단지 '싸움의 기록'이 아닌, 삶의 기록임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고구려의 보루, 고려의 제향 공간, 그리고 서민의 생활 현장까지 상상이 되었다. 이 짧은 하루 동안 나는 시대를 넘나드는 시간 여행을 했고, 그 끝에서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 가을의 하루는 아직도 내 마음속에 맑고 조용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