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먹다리
강원도 화천은 분단의 현실과 청정 자연이 공존하는,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는 도시다. 북한강을 따라 펼쳐진 이 작은 군(郡)은 사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곳으로, 여름엔 산천어가 뛰노는 맑은 물줄기와 시원한 계곡이 있고, 겨울엔 유명한 산천어축제가 열리는 축제의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전쟁과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긴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화천의 과거와 현재가 맞닿은 장소가 바로 '꺼먹다리'였다. 이른 아침, 아직 안개가 자욱하게 낀 강변에 도착했을 때,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변은 적막했고, 강물 위로는 아침 햇살이 조심스레 내려앉았다. 꺼먹다리는 단순한 목조 다리가 아니라, 지난 격동의 세월을 묵묵히 버텨온 살아 있는 유산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수차례 붕괴와 복구를 반복한 이 다리는 전쟁의 아픔과 재건의 희망을 동시에 품고 있다. '꺼먹다리'라는 이름 또한 전쟁 당시 불에 타 그을린 다리의 모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등록문화재 제110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으며, 강원도 화천을 찾는 이들에게 가장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장소 중 하나다. 다리 입구에 서자마자 이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는 걸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나무 데크로 연결된 다리 위를 걷는 동안, 발 밑에서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고, 다리 중간중간에는 탄흔과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언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곳이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안내판에 따르면, 한국전쟁 당시 국군은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이 다리를 스스로 폭파했다고 한다. 이후 마을 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다리 잔해를 건너며 이동해야 했다. 이 다리는 생존과 저항, 회복의 상징이기도 한 셈이다.나는 다리 중간에서 잠시 멈춰섰다. 강물은 여전히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고, 주변 산들은 고요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평온함은 오히려 이곳에 담긴 역사를 더 또렷이 느끼게 만들었다.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 그들의 고단함과 아픔, 그리고 묵묵히 이 강을 건넜던 발자국들이 떠올랐다. 다리 끝에는 작은 벤치와 추모 문구가 새겨진 기념비가 하나 있었다. '기억하라, 이 다리를 밟고 지나간 수많은 이들의 삶을' 이 짧은 문장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다리를 건너며 나는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단순한 나무 다리일 뿐인데, 그 위를 지나가는 내 걸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꺼먹다리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역사를 잊지 말자고,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이 평온한 일상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화천이라는 고장이 주는 진짜 감동은, 이런 조용한 공간 속에 숨어 있다.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누군가에게 화천을 추천한다면, 나는 이 꺼먹다리를 첫 번째로 꼽을 것이다.
감성마을 동구래
꺼먹다리에서의 깊은 여운을 안고 다음으로 향한 곳은 화천의 명소 '동구래마을'이었다. 이 마을은 단순한 전통마을이 아니라 자연과 예술, 그리고 힐링이 조화를 이루는 아주 독특한 공간이다. '동굴 안에 달이 뜬다'는 말에서 이름이 유래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시적인 이 마을에 마음이 끌렸다. 입구부터 계절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벽화와 예술 조형물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곳은 단순히 예쁘기만 한 마을이 아니라, 곳곳에 주민들이 직접 만든 공예품 가게가 있었고, 손으로 직접 엮은 뜨개 소품, 한지등, 유리 공예품 등이 나를 맞이했다. 작고 조용한 카페에 들어가 마을 주민이 직접 볶았다는 핸드드립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마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풍경은, 그 순간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다. 시간을 잊고 머무를 수 있는 공간, 바로 동구래마을이었다. 조용한 산책길을 따라 걷다 보면 연꽃으로 유명한 '서오지리 연꽃단지'와도 연결되는데, 내가 갔을 때는 아직 연꽃이 피기 전이었지만, 넓은 연못과 가지런히 정돈된 산책로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무릎 높이로 피어 있는 들꽃들과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은 마음을 맑게 정화시켜 주었다. 마을 전체가 하나의 야외 미술관 같았고,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 스며드는 고요함도 함께 줬다. 이 마을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바로 조용함이었다. 인위적인 상업성 없이, 주민들의 삶과 이야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는 마을이었다. 누군가 마음이 복잡하거나,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이곳을 꼭 추천하고 싶다. 예쁜 벽화나 조형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진 삶의 리듬을 체험하기 위해서 말이다.
조경철 천문대와 수달연구센터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조금 특별했다. 먼저 방문한 곳은 화천의 대표적인 과학 명소, '조경철 천문대'였다. 이곳은 한국 천문학의 선구자 조경철 박사의 이름을 딴 곳으로,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별과 우주에 대한 호기심을 되살릴 수 있는 장소였다. 천문대 입구에 도착했을 땐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이른 저녁이었다. 먼저 내부 전시관을 둘러봤는데, 우리 은하와 태양계, 블랙홀, 시간과 중력에 대한 설명이 꽤 체계적이면서도 쉽게 구성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전시관 밖으로 나와 천체 관측 시간까지 기다리는 동안, 천문대 주변을 산책했다. 고도가 높아선지 공기가 한결 맑고 시원했고, 하늘은 점점 붉은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저녁 8시쯤, 망원경을 통해 별을 보는 프로그램이 시작됐고, 나는 북극성과 목성을 관측했다. 오랜만에 보는 밤하늘은 그저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별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것 같았고, 그 순간 나는 우주라는 거대한 무대 위에 서 있는 작디작은 존재임을 실감했다. 천문대를 나와 도보로 15분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한국수달연구센터'도 들렀다. 사실 수달이라는 동물은 이름은 익숙하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이곳에서는 야생 수달의 생태에 대해 자세히 배울 수 있었고, 운이 좋으면 수달이 물속을 유영하는 모습도 직접 관찰할 수 있다. 내가 갔을 때는 마침 사육사가 수달에게 먹이를 주는 시간이었는데, 물장구를 치며 헤엄치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이 센터가 멸종위기종 보호와 생태계 회복을 위해 연구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점이었다. 환경과 생명에 대한 존중, 인간과 자연의 공존이라는 메시지가 곳곳에서 느껴졌다. 여행의 마지막 코스를 이곳으로 정한 것이 너무 잘한 선택이었다. 별과 생명, 우주와 지구, 그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울림을 느끼며, 나는 화천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